정치

"유관순 옥중서 打殺돼"…3·1운동 순국상황 드러나

호랑이277 2013. 11. 19. 23:07

 

3·1운동·日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부 공개 (서울=연합뉴스) 백승렬 기자 = 박경국 국가기록원장과 직원들이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한국 정부가 1953년에 전국적으로 조사한 3·1운동과 일본 관동(關東·간토)대지진 피살자 명부를 공개하고 있다. 2013.11.19

 

관동대지진 당시 두살 갓난아기 포함 일가족 학살·日헌병 총살 만행 등 참상 담겨

 

(서울·도쿄=연합뉴스) 이 율 기자 이세원 특파원 = 국가기록원이 주일대사관에서 이관받아 19일 사상 처음으로 공개한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와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에는 3·1운동 당시 애국 인사들의 순국 정황과 관동대학살 당시 참상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주일대사관 청사 신축에 따른 이사 과정에서 발견된 이들 명부에 실린 3·1운동 피살자는 630명, 관동대지진 피살자는 290명이다.

 

이들 명부에는 피살자 이름 외에 본적, 나이, 피살 일시, 피살 장소, 피살 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유관순, 옥중에서 打殺"…아우내 장터 희생자 기록 확인 =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에서는 유관순 열사에 관한 기록이 우선 눈에 띈다. 유관순 열사의 순국 당시 주소는 천안군 동면 용두리, 순국 장소는 서대문형무소로 나온다.

 

순국 상황 난에는 "3·1독립 운동만세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被檢)돼 옥중에서 타살(打殺) 당함"이라고 기재됐다. 유 열사가 고문에 시달리다가 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감옥에서 맞아 죽었다는 의미로 조사 당시 이같이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당일 희생자 기록이 바로 옆에 등장한다.

 

일시는 기미년(己未年·1919년) 3월 1일, 장소는 천안군 병천면 병천리라고 기재했다. 아우내 장터가 있는 곳을 이렇게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피살자 명부 (서울=연합뉴스) 한국 정부가 1953년 전국적으로 조사한 3·1운동과 일본 관동(關東·간토)대지진 피살자 명부가 사상 처음으로 발견, 공개됐다. 국가기록원은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1953년 이승만 정부가 작성한 '3·1운동시 피살자 명부(1권·630명)',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1권·290명)', '일정(日政)시 피징용(징병)자 명부(65권·22만9천781명)' 등 67권에 대한 분석결과를 공개했다. 사진은 3·1운동 피살자 명부. 2013.11.19 << 국가기록원 제공 >>

 

유 열사 부친인 유중권 열사의 기록이 먼저 나온다. 순국 경위는 "3·1운동 독립만세로 인하여 총살당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1987년에 작성한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공훈록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한다.

 

보훈처에 따르면 공훈록은 1919년 4월1일(음력 3월1일) 아우내 장터의 만세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 헌병들은 시위군중을 추격하며 발포하고 칼로 찔렀다고 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 열사와 어머니 "이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는 것이다.

 

유중권 열사의 바로 옆에 성명이 "李氏"라고 표기된 여성이 등장한다. 주소·순국장소·순국상황 난에 유중권 열사와 같다는 기호가 표기돼 있어 유관순 열사의 어머니로 알려진 이소제 열사일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유관순 열사의 어머니가 "이씨"로 표기된 것은 3·1운동 피살자 명부와 마찬가지 기록을 토대로 했기 때문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국가기록원은 이씨라는 인물을 일단 미확인자로 분류했다.

 

희생자 명부에서는 유중권 열사와 이씨를 포함해 20명이 같은 장소·날짜·상황에서 순국했다고 적시하고 있다.

 

공훈록에 나온 순국자보다 1명이 많은데 이를 토대로 추가 희생자를 파악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용달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기존의 3·1운동 관련 기록은 일본 경찰의 기록으로 조선인 몇 명이 시위에 참가해 진압과정에서 몇 명이 죽고 소요가 진정됐다는 식이어서 숫자 외에 누가 죽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면서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명부에는 순국자들의 이름과 연령, 순국장소, 상황 등이 나왔기 때문에 처음으로 순국자 개인이 어떻게 순국했는지 알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3·1운동으로 감옥살이를 한 분들은 재판기록이 있어서 보상을 받았지만 3·1운동을 하다 순국한 경우 아무런 기록이 없어 전혀 보상을 받지 못했다"면서 "명부가 발견되면서 3·1운동 당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열렬히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을 기릴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3·1운동 피살자 명부 (서울=연합뉴스) 한국 정부가 1953년 전국적으로 조사한 3·1운동과 일본 관동(關東·간토)대지진 피살자 명부가 사상 처음으로 발견, 공개됐다. 국가기록원은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1953년 이승만 정부가 작성한 '3·1운동시 피살자 명부(1권·630명)',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1권·290명)', '일정(日政)시 피징용(징병)자 명부(65권·22만9천781명)' 등 67권에 대한 분석결과를 공개했다. 사진은 3·1운동 피살자 명부. 2013.11.19 << 국가기록원 제공 >>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대표적 항일 독립운동이었던 3·1운동의 희생자 규모는 당시 일제 통계에 따르면 발발 이후 3개월간 시위진압과정에서 사망자 7천509명, 부상자 1만5천961명, 구금자 4만6천948명으로 추산됐다.

 

◇관동대학살 때 갓난아기 등 일가족 학살…日헌병, 총살 만행 = '일본 진재시 피살자 명부'를 보면, 1923년 9월 발생한 관동대지진 때 도쿄 일원에서 벌어진 조선인 학살의 참상이 생생히 드러난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규모 7.9의 대지진이 도쿄 등 일본 관동지방을 강타, 10만5천명 이상이 사망했다. 대지진의 혼란 속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넣고 다닌다'는 유언비어가 순식간에 퍼지면서 도쿄와 요코하마 등 관동지방에서 일본 군대·경찰과 유언비어를 믿은 주민들이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당시 피살자 규모는 6천명∼2만2천명으로 추산된다.

 

명부에는 경남 합천군에 연고가 있는 이모(26)씨 일가족 4명이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모두 피살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피살된 이 중에는 두 살배기 갓난아기도 포함돼 있다.

 

함경도에 연고가 있는 박모(30)씨는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헌병에게 총살당했다.

 

경찰서 유치장 등에서 숨진 경우도 있었으며 피살 방식도 타살, 총살 등 다양하게 기록돼 있다.

 

박경국 국가기록원장은 "명부에서 확인된 피살자의 숫자는 상당히 적지만 이는 일본에서 조사된 게 아니라 국내에 연고가 있는 피살자만 조사했기 때문"이라며 "구체적으로 김아무개 이아무개가 어떻게 피살당했다고 나왔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 기사입력 2013-11-19 17:45 | 최종수정 2013-11-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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