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북방한계선(NLL)·어로저지선과 연평도의 꽃게잡이

호랑이277 2012. 11. 15. 17:04

[특별취재팀]

취재 : 정지환 공희정 기자

동영상 : 김정훈 김용남 기자

 

@IMG9@

[제12신: 7월 7일 낮12시 15분]

특별취재팀, 4박5일 취재일정 모두 끝났다!

다 못쓴 취재파일 가지고 와 후속보도 예정

 

오후 1시 연평도 선착장 출항

 

<오마이뉴스> 특별취재팀은 오늘(7월 7일) 오후 1시 마침내 연평도를 떠난다. 오늘 아침 이곳 연평도의 날씨가 워낙 좋아 인천 연안부두-연평도 왕복 여객선 운항의 재개가 앞당겨진 덕분이다.

 

예기치 못한 태풍 때문에 2박3일간의 취재 일정은 4박5일로 늘어났다. 이 섬에 들어온 지 꼭 닷새만에 우리는 서울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태풍으로 발이 묶이는 바람에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사람도 있다. 특히 친척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도 어쩔 수 없이 섬을 지켜야 했던 정지환 기자의 사연은 취재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태풍으로 발이 묶였던 언론사 차량들이 하나둘 당섬 선착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각 언론사 기자들, 방송사 제작차량 기술진 등은 그동안 정이 들었던 식당, 여관 주인들과 작별인사를 하느라 분주하다.

 

연평도 앞바다는 언제 태풍이 있었냐는 듯이 고요하다. 투명한 하늘 위에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이 파도와 부딪치며 산산히 부서진다.

 

포구 한쪽 그늘엔 노인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다. 이곳에서 황해도 사투리를 쓰는 노인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연평도는 황해도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현장에서의 마지막 보고는 어설프게 얻어들은 황해도 사투리로 하고자 한다. 서술형 말투까지 사투리로 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몇개의 단어만 사투리로 바꾸어 보았다.

 

"독자 여러분 안녕해시꺄(안녕하셨습니까).

 

시방(지금) 우리 취재팀은 늦하네(서풍)가 산뜻하게 불어오는 연평도 포구에 서 있습니다. 오른켠짝(오른쪽)으로 소연평도가 멀리 건너다 보입니다.

 

눈 앞에 보이는 당섬과 안목 가녁(주변)의 갯바닥(갯벌)에는 두멍(물이 고인 곳)과 방쿠이(바위)가 사이좋게 어울려 있습니다. 안목은 연평도의 상징이 되어버린 조구(조기)가 처음 발견된 곳입니다.

 

태풍 라마순이 북상하면서 내리던 느슬비(이슬비)는 벌써 근친(그친) 지 오랩니다. 어제 지냑(저녁) 전망대에서 바라본 불구지(노을)와 야덜시(여덟시)에 올려다본 수왕길(은하수)은 퍽 고왔습니다.

 

포구에선 초매(치마) 입은 에미나이(여자아이) 하나가 가이(개) 새끼를 어르며 놀고 있습니다.

 

서해교전과 태풍으로 심들어(힘들어) 했던 연평도도 이제 안정을 되찾아가는 듯합니다.

 

냉중(나중)에 뵙겄습니다."

 

서울로 돌아가더라도 이곳에서 미처 말하지 못했던 소식과 사연들을 마무리해 전해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그동안 <특별취재팀>에 보내주신 독자여러분들의 뜨거운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린다.

 

[제11신: 7월 6일 오후 2시 30분]

 

1965년 정일권 국무총리가 연평도 찾은 까닭

연평도의 역사를 알면 문제도 대안도 보인다

- 14년 전 어민 목소리 담은 책자 독점 입수

 

오늘(7월 6일)로 서해교전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됐다. <오마이뉴스> 특별취재팀이 연평도에 들어온 지도 벌써 나흘째로 접어들었다.

 

연평도는 오전 6시 현재 북상하고 있는 제5호 태풍 라마순의 영향권에 완전히 접어들었다. 어제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자꾸만 굵어졌고, 바람도 갈수록 거세졌다. 라마순은 내일 오후 연평도를 지나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낮 12시경부터 갑자기 빗줄기가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언뜻 구름 사이로 햇살까지 비치기도 한다. 방송에선 태풍이 동해안으로 비껴갔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어민들의 잔뜩 찌푸렸던 얼굴이 조금이나마 펴지는 기색이다.

 

인천 연안부두로 떠나는 여객선은 이곳 연평도에서 언제나 뜰지 현재로선 확답하기 어렵다. <오마이뉴스> 연평도 특별취재팀도 예기치 못한 태풍으로 당초 계획보다 취재일정이 늘어났다. 그러나 취재팀은 이곳을 떠날 때까지 이번 서해교전의 진실과 원인규명을 위해 줄기차게 취재해 독자들에게 전해드릴 것을 약속드린다.

 

@IMG7@ <연평도(延坪島)>.

 

단순히 취재팀이 체류하고 있는 이 섬의 이름이 아니다. 취재팀이 어제(7월 5일) 오후 이곳 연평도의 한 주민으로부터 입수한 책의 제목이다. 그 주민은 태풍에 발이 묶인 취재진이 안돼 보였던지 "그냥 한번 읽어보라"며 이 책을 건네주었다. 발행연도가 1988년인 이 책은 모두 142쪽으로 구성돼 있었고, 누렇게 색이 바래 있었다.

 

"오늘의 발전된 연평도의 참모습을 변함없이 고향을 지키고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모든 주민과 함께 뒤돌아보고"라는 발간사의 일부 대목과 "뜻있는 분들이 조금씩 모아 놓았던 자료를 추려 장시간 여러 어른들께 자문을 구하였다"는 편집후기의 일부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14년 전에 주민들의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제작, 발간된 연평도의 향토지였다.

 

취재팀은 이 책의 내용을 검토하던 중 서해교전 사태의 근본적 원인과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취재팀도 별 생각 없이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문득 '어로저지선 관계일지'라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우선 이 책 36쪽에 적혀 있는 일지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964년 6. 20: 4부 장관(내무, 국방, 법무, 농수산) 월선조업 대책회의(경기도 어협조합장 김영배 씨와 현지 어협조합장 이태화 씨 참석).

1965: 정일권 국무총리 연평 방문(비서실장 홍성철 씨 대동).

1968: 어로저지선 발효.

1970: 해군방송선 이북 경비정에 나포."

 

이 '어로저지선 관계일지'에 따르면 1964년 당시에도 연평도에는 '월선조업' 문제가 있었으며, 이와 관련 4명의 국무위원이 어민 대표와 대책회의를 가진 것은 물론이고 국무총리까지 직접 현장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책회의가 열린 지 4년만인 1968년 정부에 의해 이른바 '어로저지선'이 발효됐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나포 행위는 그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1968년'이라는 연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취재진이 연평도 주민들에게, 특히 나이 많은 주민들에게 제일 많이 들었던 것 중의 하나가 "1968년까지만 해도 연평도 조기 파시가 대단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민들이 조기잡이의 생명이 끝난 시점으로 거명한 1968년은 정부의 '어로저지선' 발효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결국 '어로저지선' 발효가 연평도의 상징인 조기잡이의 종말을 앞당긴 직접적 원인이 됐던 것이다.

 

향토지인 <연평도> 발간 당시 송림면장(현재의 행정구역은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이지만 1988년 당시에는 경기도 옹진군 송림면이었음-기자주)이었던 최선호씨가 쓴 발간사 중에서 "예로부터 연평도는 조기잡이로 그 명성이 알려졌던 곳입니다. 어로한계선('어로저지선'과 같은 의미로 썼음-기자주) 남하로 인하여 그 화려했던 황금 파시의 풍요가 옛일로 사라졌지만"이라는 대목도 예사롭지 않게 읽힌다.

 

결국 '어로저지선'의 발효가 조업구역의 '축소'뿐만 아니라 '남하'를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로저지선'이 남쪽으로 축소 이동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을 알아보기 전에 여기서 잠시 정전협정 이후의 상황부터 차례로 점검해 보자.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북한군(+중국군) 양측을 당사자로 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군은 이 협정체결 과정에 당사자로 참여하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작전지휘권을 미군에 넘겨줬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정전협정에 따라 연평도,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우도 등 서해 5도는 유엔군에 귀속되었으며, 나머지 도서지역은 북한군(+중국군)에 귀속되었다.

 

그런데 당시 정전협정 과정에서 해상군사분계선을 명확히 규정하는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때 해상군사분계선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한 것이 지금의 서해교전 같은 비극적 사태의 원초적 발단이 된 것이다.

 

1953년 정전협정이 끝난 뒤 유엔군은 북방한계선(NLL)을 선포하고 이를 북한에 통보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바다에 경계선을 그었으니 당신은 이제부터 이것을 따르라"고 한 것이다.

 

물론 북한은 NLL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해 당사자 간의 합의에 의해서 정식으로 체결된 것이 아니라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선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1973년까지 북한도 사실상 NLL을 인정해 왔으니 관습법상 국제법적 효력을 갖는다는 게 우리 정부의 입장이다.

 

이로써 양측이 분계선을 명확히 합의하지 못한 상황에서 연평도 앞바다를 비롯한 서해5도의 해상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의 운명을 안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평도 어민들은 생계를 위해 그 화약고 위에서라도 조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자신들의 영해를 침범한 것으로 간주한 북한 측과의 끊임없는 충돌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적 우위'였다.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바다에도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실제로 당시 해군력에서 약세를 보였던 북한도 어쩔 수 없이 NLL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안한 동거'였고, 상황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월간 <말> 1999년 7월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해군력의 열세로 유엔군 측이 선정한 NLL을 묵인해오던 북한은 해군력이 반전된 1973년부터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연평도 인근 해역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1994년 11월 12해리 영해를 규정하고 있는 유엔 해양법이 타결된 후 북은 그것에 근거해 문제의 해역이 자신들의 영해임을 주장해 왔다."

 

일부 독자들 가운데는 이런 얘길 하면 아예 귀를 막아버리겠지만, 할 말은 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즉 북한의 그런 주장이 무조건 그르다고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1999년 서해교전 직후 이장희 교수(한국외국어대, 국제법)는 다음은 같은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관습법상으로 볼 때 NLL에 국제법적 효력이 있다는 우리측 주장과 12해리 영해를 주장하는 북한측 주장이 국제해양재판소에서 부딪힐 경우 오히려 북측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북기본합의서 부속합의서 10조는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계속 협의한다'고 규정했기 때문에 엄격히 보면 NLL은 우리의 일방적 주장이다. 그러므로 북이 NLL을 넘어왔다고 해서 우리 영해를 침범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이것이 민족 내부 문제라는 점에서 군사공동위원회 가동으로 해결되었으면 한다."

 

@IMG6@한편 이러한 상황의 전개가 연평도 주민들에겐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향토지인 <연평도>의 기록을 통해 확인해 보자.

 

우선 1953년 유엔군의 NLL 선포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이와 관련 <연평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평도(소연평도 포함)와 그 해역은 유엔 관리하에 있게 되고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다에 유엔관리구역을 설정하고 그 구역 내에서는 1968년까지 자유로운 조업이 이루어졌다."

 

연평도 주민들이 유엔군의 NLL 선포로 자유로운 조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긍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NLL을 기준으로 남쪽의 거의 모든 해역에서 조업을 할 수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어민들이 NLL을 '유엔관리구역'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눈길을 끈다.

 

그러나 연평도 어민들이 누리던 자유는 '불안한 자유'였다. 실제로 그들은 북한 측의 "양순한 어민의 불법 납치와 불법 포격으로 급기야 본도의 생명선이었던 조기잡이가 위축되었다"고 <연평도>에서 고백하고 있다. 이른바 '납북어부'의 비극은 이때 양산된 것이다.

 

이렇게 남한과 북한이 해상분계선을 각자 달리 설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사실상 요원해 보였다.

 

1964년 내무, 국방, 법무, 농수산 등 4개 부처의 장관이 어민 대표들과 함께 '월선조업 대책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 이듬해인 1965년 정일권 국무총리가 오지 낙도인 연평도까지 방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정부는 1968년 4개 부처 장관 명의로 '어로저지선'을 고시하게 된다. NLL 접경 해역에서의 조업 행위를 우리 정부가 전면 금지시킨 것이다. 결국 이 지역을 '어업구역'보다는 '군사지역'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에 대한 어민들의 반응이 <연평도>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정전후에도 북괴의 만행은 끝없이 계속되어 우리의 어선을 수없이 나포해 갔으니 이로 인해 조업구역을 대폭 남하하여 4개 부처 장관의 이름으로 고시하였다. 이것이 '어로저지선'이며, 연평도의 양 부리를 북방 경계로, 남으로는 덕적도 근해까지 이르렀으나 대부분의 어획이 '어로저지선' 북쪽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이로 인한 우리 도민의 타격은 심히 지대하여 타 지역으로 집단이주설까지 등장하게 되었고,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시 국무총리였던 정일권씨가 래도하였었다."

 

행간에서 북한과 남한 정부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읽혀진다. 그렇다면 당시 주민들은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다시 <연평도>의 기록을 보자.

 

"분단! 그것이 우리에게 안겨준 상처는 너무나 크다. 황금의 어장으로 불리우던 조기잡이가 중단되었고 물 위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은 우리의 뱃길을 멈추게 하고 그나마도 1968년 4부 장관 고시선('어로저지선'을 지칭-기자주)은 우리의 발길을 완전히 묶어 놓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는 연평도 면적의 3분의 2 이상을 군사지역으로 설정하고 일반 주민의 통행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북한 측의 대응도 갈수록 강경해졌다. 1970년 북한 경비정이 남한의 해군방송선을 나포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로써 연평도를 먹여 살렸던 조기잡이는 1970년대 이후 사실상 전면 중단됐고, 어민들의 경제 사정은 극도로 악화됐다. 이 기간에 적지 않은 주민들이 연평도를 떠났다.

 

실제로 1967년 3055명이었던 인구는 1970년 2592명으로 줄어들었다. 3년만에 436명이 섬을 떠난 것이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 7년 동안 42명이 준 것과 비교하면, 이 기간에 얼마나 연평도가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한때 연평도 주민의 집단이주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사전략상의 문제로 그 계획은 무효화됐다.

 

@IMG8@연평도에서 조기가 사라진 뒤 나타난 것이 바로 꽃게였다. 현재 연평도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것도 꽃게다. 꽃게잡이를 통해 연평도는 '제2의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제2의 황금시대'는 조기와 함께 했던 '제1의 황금시대'처럼 언제 또다시 물거품이 될지 알 수 없다.

 

앞서 보도한 기사에서 자세히 언급했듯이, 적정규모를 넘어선 어망의 설치 등으로 합법적인 조업구역은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데다 어족까지 감소했다. 그래서 어민들은 조업구역 밖에서 활로를 찾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다수의 어선이 조업구역은 물론이고 적색선까지 넘어가 어망틀을 설치했다는 사실이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선주협회의 공식문서를 통해서도 확인됐다. 일부 어민은 적색선은 물론이고 심한 경우 NLL까지 넘은 경우도 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어민들이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월선조업을 하는 데는 자연적 조건도 영향을 준다. 향토지 <연평도>에 나오는 "대부분의 어획이 '어로저지선' 북쪽에서 이루어졌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재 적색선과 NLL 사이의 완충지대는 황금어장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날씨가 따뜻해지는 6월이 되면 꽃게는 북쪽으로 대거 이동한다.

 

꽃게 떼를 따라 어부가 쫓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잘만 하면 한꺼번에 수천만원에서 수억원까지 벌 수 있는데, 1인당 3-7억원의 빚을 지고 있는 어민들이 참아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물 위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다. 더욱이 그 경계선도 남한과 북한이 각자 다르게 설정해 놓고 있다. 한쪽에선 자기 해역에 들어가는 것이 다른 쪽에선 '침범'이 된다.

 

물론 그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동족에게 선제공격을 한 북한의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설사 유엔 해양법상 자신들의 영해에 들어온 경우가 됐다손 치더라도 그들도 결국 당신들의 형제가 아닌가.

 

남한의 국민과 북한의 인민에게도 문제는 있다. 하나같이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듯하다. 조금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대안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된 데는 언론의 책임이 제일 크다. 일부 언론사를 제외하고 대대수 언론은 '있는 그대로' 사실을 보도하기보다 '국가주의'의 틀에서 안주하려 한다. 분단국가의 특수성 운운하기도 하고, 골치 아프게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식의 오해를 받기도 싫은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동안 모든 피해는 연평도 어민들이 감수해야 한다. 그 와중에 젊은 병사들은 언제 또다시 화염에 휩싸일지 모른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렇게 신나게(?)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전혀 풀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런 방식을 되풀이 하는 한 결국 하나가 돼야 할 한민족은 서로에게 상처를 줄 뿐이다.

 

연평도 어민들은 하루빨리 황금어장에 들어가 평화롭게 꽃게를 건져올리고 싶다.

 

@BOX5@

 

[제10신: 7월 5일 오후 3시 10분]

 

"교전 직전 연 3일 어선 50여 척 북진

적색선은 수시로... NLL도 넘은 적 있다"

- 교전 당시 조업 두 선장 인터뷰

 

어제(7월 4일) 저녁 9시 15분 연평초등학교 앞의 한 식당.

 

취재팀은 이 식당의 한 방에서 이번 서해교전 발발 당시 근방에서 조업을 했던 선장 두 명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들과의 인터뷰를 제10신으로 올린다.

 

@BOX3@이 두 사람은 6.29 서해교전 사태의 진실에 접근하는 데 있어 상당한 단서를 제공해 줬다. 이들의 증언은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것보다 생생하고 구체적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야기는 온전히 세상에 전달되지 못했다. 몇몇 언론사가 이들의 증언을 '모자이크 처리'를 통해 화면에 내보내거나 '익명'으로 지면에 등장시키긴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핵심적인 발언은 제외됐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두 사람은 그 동안 각종 언론을 통해 6.29 서해교전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주위의 따가운 시선뿐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과의 대화는 약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이들은 가끔 주위에 엿듣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방문을 자주 열어보는 등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 취재진과 만나기 전 이들은 이곳까지 찾아온 군 수사관들과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40대인 A호 선장 ㄱ씨, B호 선장 ㄴ씨.

 

한 사람은 외지인이고, 또 한 사람은 현지인이다.

 

<오마이뉴스>는 신분보장을 위해 두 사람에 대해 여기까지만 소개하기로 했다. 앞으로도 두 사람의 구체적인 인적사항이 드러날 수 있는 개인적인 이야기는 기사화 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과 나눈 모든 대화를 일문일답으로 처리한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 기사를 읽기 전에 분명히 알아둘 것이 있다. 두 사람이 증언한 '사실'이 그대로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여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먼저 두 선장이 누구보다 신빙성이 있는 목격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들은 6월 29일 직접 조업에 참여했고, 현장 가까이에서 전후 사정을 지켜봤다.

 

독자마다 가지고 있을 가치 판단과 상관없이 서해교전의 진상에 대한 종합적 판단을 위한 여러 증언 중의 하나로 여겨주기 바란다.

 

다음은 이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BOX4@- 그간 일부 언론에 이번 사태의 원인이 연평도 어민들에게 일부 있다는 진술을 했는데, 그 이유는 뭔가?

"<오마이뉴스>에서 보도한 것처럼, 연평도 어민들은 꽃게 어획을 늘리기 위해 불법으로 조업구역 밖에 뿌려 놓은 어망을 조업 마감 기간인 6월 30일 이전까지 회수해야 했다. 이를 회수하지 못한다면 그 피해액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민들의 절박한 요구를 외면할수 없었던 해군2함대가 다행히 이 요구를 승낙해줬다.

 

6월 27일 오전 출항 허락이 떨어져 출발했지만 일부 어선들이 적색선(어로저지선)까지 넘어 조업을 했다. 하지만 츨항한 지 1시간 30분만에 '빨간 바가지'(북한 경비정)가 뜨는 바람에 회항해야 했다.

 

6월 28일에는 해군이 출항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조급해진 30여 척의 어선들이 일제히 무단으로 출항을 했다. 그리고 선장들은 비상통신 주파수를 맞춰 오전 8시에 일제히 조업구역을 벗어나는 월선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날도 역시 '빨간 바가지'가 떴다. 그래서 어선들은 오전 12시 회항해야 했다.

 

전날의 무단출항에 놀랬는지 해군은 6월 29일 적색선을 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출항을 허락했다. 출항하는 어민들에게 사인까지 받았다. 하지만 6월 29일에도 12척의 어선이 이를 어기고 적색선을 넘었다.

 

그런데 오전 8시경 갑자기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북한 경비정이 떴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선들은 이를 무시하고 조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얼마 후 교전이 벌어졌고, 죄없는 젊은 병사들이 죽게 된 것이다.

 

만약 어선들이 해군의 지시를 어기지 않고 조업을 했더라면 북한군도 자극받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50척이 넘는 배들이 일제히 적색선을 넘어 3일째 북진을 하는데 놀라지 않겠나."

 

- 최근에는 항법장치가 잘 발달돼 있어 좌표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가. 왜 적색선을 무시하고 조업을 강행하나?

"자꾸 언론에서 적색선이니 NLL을 따지는데, 그것은 해군이나 알지 선장과 어민들은 솔직히 어디가 어딘지 모른다. 자세한 적색선의 한계와 NLL의 좌표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는 위치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육지가 아니라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이다. 서울에 앉아서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민들은 해군에서 무전으로 경고를 해줘야 그때서야 적색선을 넘었는지 알게 된다. 일부 연평도 어선들 중에는 NLL을 넘은 적도 있다."

 

- 그것을 어떻게 장담하나. 당신들이 직접 NLL을 넘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NLL이 좌표에 나오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회항을 하고 나면, 월선을 밥먹듯이 하는 선장들은 자신이 적색선으로부터 6마일을 더 나갔느니, 5.5마일을 더 나갔느니 하며 자랑한다. 보통 적색선으로부터 3-4마일 앞이 NLL이다. 그래서 NLL을 넘었다고 말한 것이다."

 

- 예년에는 월선의 빈도가 어땠나?

"올해에만 이런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월선은 이곳에선 하나의 관행이다. 일부 어선들은 벌금을 낼 각오를 하고 월선을 했다. 특히 올해는 다른 해와 달리 꽃게 수확이 현저히 줄었다. 당연히 눈치를 보던 어선들도 하나둘 월선을 해서 어망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조업구역을 넘어 적색선 근처에 설치된 어망만도 그 숫자가 800여 개에 달하는 것으로 안다."

 

- 어떻게 그 수치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바다에는 어망틀을 설치하면 부표를 띄워서 위치를 표시한다. 그걸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 다른 해와 달리 조업구역 밖과 적색선 근방에 어망을 많이 설치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보통 월선을 하게 되면 벌금을 물거나 사법처리를 받게 되는데, 올해에는 처음부터 일부 선주들에게는 '자인서'만 받고 이를 방조했던 것이다. 이번에만 연평도 어민들은 약 70여 통의 '자인서'를 쓴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거의 사법처리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너나 할 것 없이 월선을 하게 됐고, 어망을 철거하기 위해 단합해서 강력하게 군에 협조를 요청했던 것이다. 이번에 서해교전이 벌어지던 날과 그 이전 이틀 동안에도 연평도에 있는 모든 어선이 출어를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 서해교전이 벌어졌을 당시 두 사람은 어디에 있었나?

"교전이 벌어지던 시각에 18번 부이 근방에서 어망틀 철거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당시 조업구역 밖에 두 척의 어선이 있었는데, 고속 경비정이 다가와 회항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부했고 실랑이가 이어졌다. 하지만 고속 경비정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이내 NLL 쪽으로 향했고, 남아 있던 두 어선은 재빨리 서쪽으로 더욱 더 나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날 우리가 봤던 두 척의 경비정 중 하나가 이번에 침몰한 경비정이었다."

 

[제9신: 7월 5일 오전 11시]

 

MBC가 서해교전 특종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

"6월 29일 오후 5시 첫 제보, KBS는 거부했다"

 

- '최초 제보자' 신남석 씨 인터뷰

 

@IMG5@취재팀이 연평도에 들어온지 오늘(7월 5일)로 사흘째다. 당초 오늘 이곳을 떠날 계획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태풍으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지금 연평도는 '태풍전야'를 연상시키고 있다. 어제 낮12시 태풍주의보가 내려진 이후 바다에는 어선, 여객선의 출항이 모두 통제되면서 오늘 오후 1시 인천으로 향하려던 여객선 역시 발이 묶였다.

 

지금 연평도에는 보슬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포구에는 어선에 내걸린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어선 출항이 통제되면서 포구에서 어민들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 시각 연평도는 쥐죽은듯이 고요함 가운데 적막감마저 들고 있다.

 

이곳 연평도에서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가옥들은 모두 볼품없지만 지붕위에 내걸린 접시모양의 TV수신용 위성안테나다. 주민들에 따르면, 두달 전쯤 월드컵을 앞두고 모두 새로 시설을 구비했다고 한다. 외딴 섬이지만 TV시청 하나만은 대도시 뺨칠 정도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오마이뉴스>는 어제 약속했던 대로 서해교전과 월선조업의 관계를 설명해줄 한 주민과의 인터뷰 기사를 올리는 일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인터뷰는 어제(7월 4일) 오전 10시부터 1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사실 이 기사는 인터뷰가 끝나는 대로 정리해서 올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선주협회 공문을 입수하는 바람에 차질(?)이 생겼다.

 

@BOX1@신남석 씨(52).

 

그는 서해교전이 벌어지던 당일 가장 먼저 MBC에 제보를 했던 사람이다. 서해교전 당시 현장에 수십척의 어선이 있었으며, 사실 그 지역은 어선이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었으며, 그러나 그런 불법적 월선조업은 연평도에서 관행처럼 있어왔다는 사실 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기까지는 그의 역할이 컸다.

 

카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신 씨는 연평도 재향군인회장도 맡고 있다. 경남 진해가 고향인 그는 해병대에서 10년 동안 직업군인으로 장기복무를 했다. 월남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던 그는 당시 부상을 당한 국가유공자이기도 하다. 그의 집 거실 벽에는 대통령에게 받은 국가유공자 증서와 참전용사 증서, 그리고 훈장이 걸려 있다.

 

신 씨가 연평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2년. 월남전에서 돌아온 뒤 배치된 곳이 바로 이 섬이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이곳에서 살았으니, 연평도는 이제 그의 진짜 고향이 됐다.

 

그는 기자들이 질문을 하면 말문을 닫아버리는 다른 대다수 주민과 달리 취재진과 만나자마자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밝혔다.

 

"설사 맞아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할 말은 하며 살고 싶다. 물론 이북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와 우리 경비정을 향해 선제공격을 한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서해교전이 있던 당일에 우리 어선이 어로한계선을 월선한 것과 이를 통제하려던 해군 경비정과 숨바꼭질을 벌였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 어선들이 북방한계선 쪽으로 접근함으로써 서해교전의 일부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 제일 먼저 MBC에 제보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처음부터 MBC에 제보를 한 것은 아니다. 사실 첫 제보는 다른 모 방송사(나중에 그는 그 방송사가 KBS였다고 밝혔다) 본사 보도국에 했다. 그런데 달갑지 않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곧바로 MBC로 다시 전화를 한 것이다. MBC는 제대로 전화를 받았다."

 

- 첫 제보를 한 시점은 언제인가?

"서해교전이 발생했던 6월 29일 오후 5-6시경이었다."

 

- 그 제보 때문에 연평도 주민들이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했나?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부 어민들 때문에 수많은 젊은 생명이 다치거나 죽어가는 상황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직접적 원인은 북한 경비정의 선제공격이었지만, 어민들도 어로한계선을 벗어나 북방한계선에 접근함으로써 교전의 원인을 제공한 것에 대해 일정 정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병사들의 유족과 가족에게 있는 그대로 진실을 알리고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차원에서 제보한 것이다."

 

- 현장에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어떻게 알게 됐나?

"우선 현장에 조업을 나갔다가 전 과정을 지켜보고 돌아온 어민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당섬 선착장에 실려온 전사자의 시신과 부상자를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나는 해병대에서 장기근무를 했고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한 사람이다. 병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직접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제보 사실이 알려진 뒤 어려움은 없었나?

"MBC에 제보한 것이 알려진 뒤 협박전화를 많이 받았다. '바다에 나가지도 않았던 놈이 왜 나서 가지고 우리에게 피해를 주느냐'는 것이 그들이 나에게 퍼부은 비난이었다."

 

-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고 보나?

"어로구역이 좁으니까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어로한계선을 넘어가면 꽃게가 많이 잡힌다. 어민들이야 한 마리라도 더 잡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6월 말이면 조업이 끝나는데 올해의 어획량은 예년보다 4분의 1에서 5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더욱이 어망을 설치하느라 많은 비용이 들어간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민들은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고 월선을 한 것이다."

 

- 특별히 올해에 어획량이 줄어든 이유는 무엇인가?

"조업상의 기술적 문제도 있었을 테고 수온도 예년에 비해 턱없이 낮아졌다. 조업구역에서 너무 많이 잡다 보니 줄어든 측면도 있을 것이다. 꽃게가 아무리 많아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

 

- 어민들이 빚을 많이 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대략 얼마나 되나?

"어선 1척당 평균 2-3억원 수준은 될 것이다. 어망 한개 설치하는 데 대략 800만원이 든다. 그런 것을 30~50개 설치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 가격이 얼마나 될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어선을 운영하려면 최소한 선원 5~6명은 데려와야 한다. 그들 각자에게 선도금으로 5백만원을 준다. 그 비용은 거의 모두 객주에게 빌린 것이다. 결국 그게 다 빚이 된다."

 

- 어선들의 월선 빈도수는 얼마나 되나?

"월선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곳 연평도에서 그것은 관행에 가깝다. 선주들은 현재의 조업구역이 작다면서 늘려 달라고 수산청 등에 민원을 제기해 왔다."

 

- 북한 경비정은 북방한계선을 자주 넘어오나?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지만 자주 넘어온다. 이북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오는 것이 종종 목격된다. 어떤 때는 연평도에서도 육안으로 보인다. 사실 북한은 북방한계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러다 보니 월선하는 우리 어선과 북한 경비정 사이에서 해군이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해군은 어민 보호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 어선이 어로한계선을 넘으면 당연히 막을 수밖에 없다."

 

- 그 과정에서 해군과 어민이 갈등하거나 충돌하는 일도 발생하나?

"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그것도 '또하나의 전쟁'인 셈이다. 그러나 어민을 보호해야 하는 선박은 몇 척 되지 않는다. 옹진군에서 운영하는 비무장 어업지도선 2척과 해군 경비정 6척이 전부다. 56척이나 되는 어선이 사방으로 흩어지면 사실상 통제가 어려워진다."

 

- 통제하려는 측과 벗어나려는 측이 있으면 '특혜 시비'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일이야 육지나 바다나 똑같지 않겠는가. 파워 있는 사람이나 그와 친한 선주의 어선은 월선을 해도 눈감아 줄 수도 있는 거고, 그렇지 못한 사람의 어선은 불리한 처사를 받을 수밖에 없는 거고, 뭐 그렇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는가?

"이번에 서해교전이 벌어졌을 당시에도 해군의 통제를 무시하고 제일 깊숙이 월선을 해서 문제가 된 어선은 그 '파워 있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배였다. 그 사람은 현재 연평면의 정치와 경제를 주무르고 있는데,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당장 알 수 있는 그런 인물이다. 선주들도 그 사람을 지지해서 덕을 보려는 측과 그 사람을 반대하고 불만을 가지고 있는 측으로 나뉜다."

 

- 월선을 하지 않는 어선도 있나?

"드물긴 하지만 그런 경우도 있다. 사실 여기에 바로 문제의 핵심이 있다. 법을 지키는 사람은 꽃게를 많이 잡지 못해 손해를 보고, 도리어 법을 안 지킨 사람이 잘 사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북 경비정이나 어선이 북방한계선 쪽으로 다가오거나 넘어오면 우리 어선은 철수해야 한다. 합법적으로 조업하던 어선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다 보니, 그런 어민들의 불만은 클 수밖에 없다."

 

- 행정 관청에 이런 사실을 알린 적은 없나?

"관청만이 아니라 통제소에서도 이런 사실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주민들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려 하지 않는다. 나처럼 이런 사실을 외부에 알리면 '남이나 씹는 사람'으로 취급하거나 '동네를 시끄럽게 만드는 사람'으로 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실을 숨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BOX2@

 

[제8신: 7월 4일 오후 7시 15분]

 

<오마이뉴스> 특별취재팀이 7월 4일 연평도 현지에서 입수한 연평도 선주협회(이하 선주협회)와 옹진수협 연평출장소(이하 옹진수협)의 공식문서를 통해 연평도 어민들이 조업구역을 벗어나 북방한계선(NLL) 근처에서 '월선조업'을 일상적으로 벌여온 사실이 확인됐다.

 

아울러 월선조업을 통해 조업구역 밖에 설치된 어구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연평도 어민들의 엄청난 재산 피해는 물론이고 심각한 환경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돼 긴급대책 마련이 절실한 것으로 나타났다.

 

선주협회의 공식문서 중 일부를 입수해 가장 처음 보도한 것은 <경향신문>. <경향신문>은 7월 3일 '월선어구 세부계획 상정안'을 입수, 연평도 꽃게잡이 어선의 '월선조업' 사실을 문서로 공식확인 보도한 바 있다.

 

@IMG4@그러나 <오마이뉴스>는 7월 4일 선주협회 문서뿐만 아니라 옹진수협에서 작성한 문서까지 포함해 총 12건을 입수함으로써 연평도 꽃게잡이 어선들의 월선조업 현황을 보다 정확하고 상세하고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취재팀이 문서를 확인한 결과, <경향신문>이 입수한 문서에는 월선조업을 통해 조업구역 밖에 설치된 어구를 철거하기 위한 단계별 방안의 개요만 나와 있었다.

 

이에 비해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문서에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어구의 수량, 위치 등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보다 진일보한 자료로 평가된다.

 

선주협회 문건에 따르면, NLL에서 수 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어로저지선(적색선) 근처와 조업구역 밖으로 월선하여 설치된 그물(어망틀)은 지난 5월 26일까지 확인된 것만 총 459개인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어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6월 중순까지 어망이 지속적으로 설치됐다고 가정했을 경우 그 수는 최대 700여개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또 선주협회 문건에 따르면, 월선조업은 매우 광범위하고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월선조업을 통해 그물을 설치한 연평도 소속 어선은 무려 55척에 이른다. 연평도 전체 어선은 모두 56척(대연평도 33척, 소연평도 23척)으로, 결국 한 척의 어선만 빼놓고 나머지 어선 거의 모두가 조업구역 밖으로 나가서 그물을 설치했다는 말이 된다.

 

한편 어민들은 조업구역 밖에 설치한 어망을 거두기 위해 현지 해병대 부대와 해군 2함대사령부 등에 수 차례에 걸쳐 다음과 같은 협조 공문을 보낸 사실도 확인됐다.

 

'월선어구 철망에 따른 철망기간 및 합동점검반 운용'(5·27) '월선어구 철망에 대한 협조'(6·24) '월선어구 세부계획 상정안'(6·24) 등의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5월 23일 발송한 '월선어구 철망 협조안 상정' 공문에는 "저희 어업인들은 이제는 철망(어망 철수)해서 어망 손실이라도 최소화하는 것이 살길이라 판단하고 있기에 월선어구 철망안을 재차 상정하오니 선처 바랍니다"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는 그 이전에도 이런 요구가 있었다는 반증이다.

 

@IMG2@특히 문서 가운데 6월 24일 작성된 '월선어구 철망에 대한 협조' 공문에 등장하는 "우선적으로 작전수로 내 어망틀을 철망하고 나서부터 11번 부이(부표 이정표로 보임-기자주)-21번 부이까지를 시작으로 구역별 철망조업이 될 수 있도록 선처 요망"이라는 대목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작전수로'는 어선의 출입과 조업이 통제되는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IMG3@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6월 24일 작성된 '월선어구 세부계획 상정안' 공문이다. 여기에는 4단계에 걸쳐 어망을 철거하는 방안이 제시돼 있다. 그런데 3단계 방안에는 "적색선 이탈 어망 완전철망'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 시기가 바로 서해교전이 일어나던 날(6월 29일)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한편 연평도 어선들의 월선조업 사실은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옹진수협 문서를 통해서도 거듭 확인됐다.

 

그러나 <오마이뉴스>는 이 문제와 관련, 어민들을 다각도로 취재한 결과 새로운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월선조업이 불법임에는 분명하지만 모든 책임을 어민들에게 돌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최종 판단을 내렸다.

 

우선 조업구역 밖에 설치된 어망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어민들은 엄청난 재산상의 피해를 입을 것이 불보듯 뻔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공식 집계된 459개의 어망틀을 잃을 경우 어민들은 앉아서 32억원의 손해를 입게 된다(어망 1개 틀당 가격 7백만원 적용). 만약 다른 어민들이 증언한 대로 어망이 모두 700개라면 그 수치는 49억원으로 치솟는다. 물론 이 액수는 어망에 걸려 있는 꽃게의 값은 제외한 것이다.

 

어민들이 올해 꽃게 흉년으로 엄청난 부채를 지고 있다는 사실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선주협회 문서에 따르면, 어민들은 어선 1척당 3억원에서 많게는 7억원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고 있는 형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망을 바다속에 그대로 둘 경우 수많은 물고기들이 거기에 걸려서 죽게 될 것이고, 또 이번 태풍에 휩쓸려 갈 경우 상상치 못할 환경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과정이야 어찌됐던간에 꽃게잡이 어선들의 '월선조업' 문제는 빠른 시일 내에 합리적인 방안이 강구돼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주민들의 의견이다. '서해교전 사태'라는 민감한 사안이 걸려 있긴 하지만 지혜로운 합의가 절실한 상황이다.

 

아울러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는 일부 주민의 의견도 있다. 1960년대 조기 파시(波市) 때처럼 남북한이 사실상의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해 평화롭게 어로작업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REL@

 

오마이뉴스=·정지환/공희정 기자

 

기사입력 2002-07-04 10:32 | 최종수정 2002-07-04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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