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거쳐간 외국군대들]
용산 미군기지 자리는 외세가 침입했을 때마다 외국군이 주둔했던 곳으로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담고 있다.
용산 일대에 외국군이 처음 들어온 것은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말 한반도를 침입한 몽고군은 당시 용산지역을 병참기지로 활용했다.
임진왜란 때는 평양전투에서 패한 왜군 고니시 병력이 원효로 4가에, 가토 병력은 청파동 일대에 각각 주둔했다.
이처럼 용산지역에 외국군이 주둔하게 된 것은 이 지역이 전략적인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용산지역에 가까운 한강을 통해 상륙한 뒤 남산과 북한산을 점령하면 서울을 쉽게 함락시킬 수 있는 데다 운송이 편리하고 퇴로가 항상 확보돼 있다.
용산 미군기지 내에 있는 야산의 이름 둔지산(屯之山)도 외국군이 주둔한 산이라 해서 붙인 것이다.
용산지역에 외국군이 본격적으로 주둔하게 된 시기는 구(舊)한말이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병력 3천명이 주둔한 데 이어 러.일전쟁을 앞둔 1904년 일본은 용산 일대에 수만명의 일본군이 주둔할 수 있는 병영을 지었다.
당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내세워 용산지역의 부지 3백만평을 헐값에 강제수용해 이 가운데 1백15만평을 군용지로 사용했다.
이 군용지가 바로 현 용산 미군기지의 기반이 됐다.
현재 용산기지의 지휘시설이 있는 메인포스트(Main Post)의 오래된 벽돌 건물은 일제 때 일본군이 군마(軍馬)를 키우던 건물로, 미군이 개조해 이용하고 있다.
용산지역에 부지를 확보한 일본군은 이곳에 조선주둔일본군사령부와 조선총독부 관저, 20사단 사령부를 설치하고 2만명의 병력을 주둔시키면서 만주 침공의 후방기지로 삼았다.
용산기지는 45년 해방 후 미군 손에 넘어갔다.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그해 9월 2일 발표된 한반도 분할점령을 공식화하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일반명령 제1호`에 따라 오키나와에 있던 미 24군단장 하지 중장으로 하여금 남한을 점령케 했다.
이에 따라 미 7사단 병력 1만5천명이 용산에 진주, 일본군의 병영을 모두 접수하면서 용산기지를 차지했다.
이어 터진 6.25 전쟁에 개입한 미군은 53년 7월 휴전 후 용산기지를 다시 사용하게 되면서 한국이 미군에 제공하는 공여지 형태로 정리됐다.
그후 미군은 주한미군사령부(57년)와 한미연합사령부(78년)를 연이어 창설하면서 용산지역을 사실상 관할해 왔다.
2001.12.15
중앙일보
김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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